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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자암개구유인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526
한자 尊者庵改構侑因文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한금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술 시기/일시 1507년연표보기 - 홍유손 『존자암개구유인문(尊者庵改構侑因文)』저술
간행 시기/일시 1810년 - 『존자암개구유인문』 이 수록된 『소총유고』 간행
암자터 존자암지 - 제주도 서귀포시 하원동 지도보기
성격 서적|고서
저자 홍유손
편자 홍술조
간행자 홍술조

[정의]

1507년 존자암(尊者庵) 중수를 권하기 위해 홍유손(洪裕孫)이 쓴 글.

[개설]

「존자암개구유인문」홍유손한라산존자암을 다시 중수하고자 하는 인연을 널리 권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쓴 글이다.

[저자]

홍유손(洪裕孫)[1431년~1529년]이다. 홍유손은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제주도에 유배되어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고 1507년까지 제주도에서 생활하였다.

[편찬/간행 경위]

「존자암개구유인문」홍유손존자암 중수를 위해 쓴 글로 홍유손의 문집 『소총유고』 상권에 실려 있다. 『소총유고』는 1810년 홍유손의 8세손 홍술조가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경일의 서문과 권말에 홍술조의 발문이 있다. 문(文)에는 부·설(賦·說) 등 25편이 있고‚ 시 50수‚ 부록으로 행장·유사·불정공시 등이 있다.

[구성/내용]

「존자암개구유인문」은 우선 존자암 중수 이유를 밝혔다. “공덕을 권유하는 것이 백성을 교화하는 데 보탬이 되고, 공덕 가운데에는 절을 짓는 것이 제일”로 “중생들이 공덕을 쌓으려는 마음을 가지면 선을 생각하는 마음이 따라서 생겨나 사람마다 자비를 품고 악행을 경계하게 되니 절을 짓는 것이 굶주린 사람을 구제하고 추위에 떠는 사람을 덮어줄 줄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무리들에게도 보탬이 된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존자암의 역사를 써 놓았다. “존자암은 제주도에 세 성(姓)이 처음 일어날 때 창건되어 세 읍(邑)이 정립한 뒤에까지 오랫동안 전해 왔으니, 비보소(裨補所)[부처의 힘을 빌어 지덕(地德)이 쇠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국가에서 절을 세운 곳]이자 세상에 이름이 난지 오래이다.”고 하여 존자암은 제주도에 고(高)·양(梁)·부(夫) 삼성(三性)이 처음 일어날 때 창건되었음을 기록해 놓았다.

이어서 제주도의 많은 백성들은 “제주도 정의현의 대족들이 악질에 많이 걸린 것도 존자암을 폐한 뒤부터이고, 흉년이 드는 것도 이 암자를 중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고 “존자암을 중수하는 일이 금법(禁法)에 저촉된다고 만류하여도 막을 수 가 없다” 하였다. 그리하여 “그간 토목공사의 경비를 충당하지 못해 중수할 계획만 생각해 온 지가 여러 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존자암은 나라에서 이 암자에 논을 하사하여 벼를 심어 재(齋)를 지낼 경비로 삼고, 음력 4월에 길일(吉日)을 잡아 세 읍의 수령 중 한 분을 뽑은 다음 목욕재계하여 이 암자에서 제사지내게 하고 이를 국성재(國聖齋)라 하였는데, 지금은 이 제사가 폐지된지 6, 7년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홍유손존자암이 현무·주작·청룡·백호의 형국을 갖춘 지리에 위치해 있음을 말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도 중수한 적이 있으나 다시 부서지고 허물어져 옛 암자 터에 다시 개수하려고 승도들을 불러 일꾼이 모였으나, 끼니를 제공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으며, 이에 인과를 깊이 생각하여 존자암 중수 시주를 권하니 이것은 선(善)을 행하는 마음을 권하는 일”이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의의와 평가]

1500년대 초반 제주도 역사 및 제주불교사의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의의가 있다. 존자암제주도 서귀포시 하원동에 지금도 그 터[존자암지]가 남아있는데 국성재를 지내던 비보소임을 기록해 놓고 있어 제주도 역사 자료로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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