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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691
한자 法華寺址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하원동 1071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한금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269년(원종 10)연표보기 - 법화사 중창불사[추정기간 시작]
특기 사항 시기/일시 1279년(충렬왕 5)연표보기 - 법화사 중창불사[추정기간 종료]
문화재 지정 일시 1971년 8월 26일연표보기 - 법화사지 제주도 기념물 제13호로 지정
소재지 법화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하원동 1071번지 일대지도보기
성격 사찰터
지정 면적 약 20,800㎡
소유자 법화사
관리자 서귀포시
문화재 지정 번호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3호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하원동에 있는 고려 시대 절터.

[개설]

법화사는 고려의 비보사찰(裨補寺刹)로서 국가 차원의 각종 지원을 받는 산남[한라산 남쪽 지역]의 대표적 사찰이었다. 발굴 조사 결과 법화사지에서는 고려의 왕궁지인 개성의 만월대와 몽고 왕궁에서 출토되는 것과 흡사한 용과 봉황문 막새가 출토되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태종실록(太宗實錄)』에 의하면 당시 법화사에는 원나라 양공이 만든 미타 삼존 불상이 봉안되어 있었다. 후에 명나라가 이 동불상을 근거로 제주도에 대한 지배권을 지속시키려는 의도로 사신을 파견하자, 이를 눈치 챈 조선 태종은 동불상을 직접 한양으로 이송하여 명나라로 보낼 것을 결정하였다. 이 운반 과정은 제주도에서 한양으로 싣고 올라갈 때 동원된 짐꾼이 수천여 명에 이를 만큼 장대하였다고 한다.

[변천]

발굴 조사 내용과 유물 출토 상황을 종합해서 법화사 건물지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건물지 구역은 크게 세 번에 걸쳐 건물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사찰 축조의 초기에 해당하는 시기로 금당 추정 건물지와 관련된 고려 말기이며, 두 번째는 고려 후기 사찰 건물이 허물어진 다음 시기로 법당지가 존재했던 조선 전기, 마지막 세 번째는 승방 추정 건물지가 있었던 조선 전기 말경이다.

[위치]

법화사지서귀포시 하원동 1071번지 일대이다. 유적이 자리한 지형은 해발 160~170m에 이르는 완만한 평지이다. 사찰 앞에는 해발 165m의 구산봉이 있고, 사찰의 중심으로 동쪽에 강정천(江汀川)이, 서쪽으로는 중문 한천(漢川)이 자리하고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법화사지 발굴 조사는 모두 8차에 걸쳐 실시되었다. 1차 조사는 명지 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이루어져 고려 시대 금당지(金堂址)가 확인되었다. 이후 발굴 조사는 제주 대학교 박물관에서 이루어졌는데, 5, 6차 조사는 건물지 구역에 대한 발굴이었으며, 나머지 조사는 모두 연지 구역에 대한 발굴이었다. 발굴 조사 결과에 따라 크게 4차 시기로 나누어 본다면 다음과 같다.

1) 1차 시기[ ~1269년 이전]

이 시기는 법화사의 창건시기에서 중창시기까지 이다. 중창에 대한 절대 연대 자료는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지원육년기사 시중창 십육년기묘필(至元六年己巳 始重刱 十六年己卯畢)」 명문와이다. 내용은 ‘지원 6년[고려 원종 10년(1269)]에 중창을 시작하여 지원 16년[고려 충렬왕 5년(1279)]에 중창을 마쳤다’는 것으로 고려 혹은 그 이전 시기에 법화사가 창건되어 있었고 1269년에 와서 대대적인 중창 불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창건 시기를 유추할 수 있는 연대가 앞선 유물로는 개원통보, ‘법화경전등잔차양사시주주경(法華經前燈盞此樣四施主朱景)’ 명(銘) 청동등잔과 청자양각연판문 대접, 고급도기 등이 있다. 먼저 개원통보는 동전 전면에 ‘개원통보(開元通寶)’라고 쓰여 있고, 뒷면 상단은 초승달 모양이 새겨진 형식으로 이러한 개원통보 양식의 주조시기는 무종 회창년간(會昌年間)[841~846]이다. 그리고 일부 도기 중에 10세기 이전의 제작 수법을 가진 것들이 출토되었다.

2) 2차 시기[1269~1400년경]

이 시기는 제주에 원의 지배가 이루어지고 이에 따른 탐라 총관부가 설치된 후 원에 의해 중창된 사찰 건물이 존속했던 시기이자 법화사의 전성기이다.

이 시기 건물지 중 특수 건물지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 약 100평 이상의 부석사 무량수전의 형태로 조사되었다. 이 건물지의 지붕 처리는 운용문 수막새, 운봉문 암막새, 주름무늬 암키와가 세트로 사용되었으며, 운봉문 수막새 중 일부는 연목(連木)기와가 사용되었다. 아마 제주도에서 제일 웅장한 건물로 추정되며, 원의 양공이 만든 동불상 3기가 안치되었던 곳으로 보인다.

이 건물의 위세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용과 봉황문 막새이다. 원래 이 기와는 왕실 건축 이외의 건물에는 사용할 수 없는 금기품이었다. 즉 원의 왕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건물로 보이며 추가로 중국 절강성 관요에서 구어낸 원대 백자의 유입과 사용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잇다.

이 건물의 축조시기는 고고학적 절대 연대 자료인 「지원육년기사시중창십육년기묘필(至元六年己巳始重刱十六年己卯畢)」 명문와에서 보이는 지원 6년[고려 원종 10년 (1269)]에서 지원 16년[고려 충렬왕 5년(1279)]이다. 다른 건물지에서는 일상 용기들이 발굴되었는데 모두 폐와무지에 묻힌 상태였다. 여기서는 청자음각앵무문대접·청자양인각국당초문대접·청자음각화문잔받침·청자상감매병·청자상감국화문마상배·청자상감모란문잔·청자상감국화문잔·청자퇴화문뚜껑·청자상감두침·투각청자·청자화형전접시·청자상감여지문대접·청자상감운학문대접·청자양각연판문대접·청자반 등의 유물이 발굴되었으며 연대는 모두 13세기 전후이다.

3) 3차 시기[1400~1600년경]

이 시기는 원과 관련된 건물이 허물어진 이후로, 이전 시기 건물의 기와와 초석 등이 이 시기 신축 건물에 사용되었다. 이 시기는 금당지·법당·기타 부속 건물 등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시기 건물지는 이전 시기의 건물에 비해 규모가 작아지고 있고 건물 내부의 초석과 석재의 다듬질이 엉성하다. 이시기에 속하는 유물은 조선 청자·상감 분청·인화 분청·조화 분청·철화 분청·귀얄 분청·덤벙 분청 등의 도자기류와 석재 나한상 등이 있다.

4) 4차 시기[1600년경~ ]

이 시기는 18세기 이후의 후기 백자 사용 시기와 맞물린다. 건물지는 모두 초가로 판단된다. 건물지와 초가 관련 시설물, 그리고 화초나 채소 등을 재배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계단상 유구, 무너져내린 외곽 담장, 뚜렷하지 못한 배수 시설이 이시기에 해당하는 유구이다. 이 시기에 관한 내용은 효종 4년(1653) 이원진에 의해 편찬된 『탐라지(耽羅志)』 대정현 불우조에 ‘법화사는 현 동쪽 45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절터와 나한전 자리의 초석과 섬돌을 살펴보면 모두 크고 정밀하게 다듬은 석재를 사용하였으니 그 전성 시에는 굉장하였을 것임을 생각할 수 있다. 지금은 단지 초가 암자 몇 칸만 있다. 그 서쪽에 물맛이 좋은 샘이 있는데 절 앞 논에 물을 댄다.’라는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1653년경에 이미 법화사는 몇 채의 초가만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현황]

1982년부터 대대적인 발굴과 복원 작업이 이루어져 전국 최대의 구품 연지와 극락전, 선원, 문루 등 13개 동의 당우가 복원되었다. 특히 당시 대웅전의 경우 정면 5칸, 측면 4칸의 108평 규모의 팔작지붕 양식으로 복원되어 명나라에 빼앗긴 금동 삼존상을 상징하는 의미로 지금의 석가여래에 협시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다.

지난 2010년 법화사지를 중심으로 추가 복원 작업이 이루어져 대웅전을 비롯한, 구화루와 구화루 앞의 연못, 요사채 건물 등이 새롭게 복원되었다.

[의의와 평가]

법화사는 호국 불교를 내세운 사찰 가운데 하나로, 13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종교적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으로도 제주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했던 곳으로서 가치가 있는 사찰터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