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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1034
한자 韓蕆
이칭/별칭 서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송문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371년 - 한천 경상도 도순문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76년 - 한천 원주에 유배됨
활동 시기/일시 1391년 - 한천 판개성부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92년연표보기 - 한천 제주도로 유배됨
묘소 한천 묘소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지도보기
사당 충의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성격 문신|유배인
성별
본관 청주
대표 경력 판개성부사

[정의]

조선초 제주도에 유배 온 문신으로 청주 한씨의 제주 입도조.

[개설]

한천(韓蕆)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활동한 문신으로 1392년 조선왕조가 개창될 때 단양군(丹陽君) 우성범(禹成範)이성계를 제거하려고 모의하다 발각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후에 제주에 정착하여 청주 한씨의 제주 입도조가 되었다.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호(號)는 서재(恕齋). 아버지는 도첨의사(都僉議事)를 지낸 한대순(韓大淳)이고, 어머니는 천안 김씨(天安 金氏)로 진현관 대제학(進賢館大提學)을 역임한 김신(金信)의 딸이다. 부인은 광산 김씨(光山 金氏)로 정당문학(政堂文學) 김진(金稹)의 딸이다.

[활동 사항]

한천(韓蕆)은 1364년(공민왕 14) 전리판서(典理判書)로서 시관(試官)이 되어 민안인 등 인재를 선발하였고 1371년(공민왕 20)에는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 되었다. 1376년(우왕 2) 친족인 한안(韓安)공민왕 시해사건에 연루되어 참살되었고 한천은 연좌되어 원주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풀려났다.

1391년(공양왕 3)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가 되었고, 1392년 조선왕조가 개창될 때 공양왕의 사위이던 단양군(丹陽君) 우성범(禹成範)이성계 제거를 모의하다 발각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393년(태조 2) 태조가 고려왕조 대신 71명을 포상하라는 명을 내려,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다. 1400년(정종 2) 권희(權禧) 등과 함께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그 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 정착하여 청주 한씨의 제주 입도조가 되었다.

1879년 면암 최익현(崔益鉉)은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풀려 제주를 유람하며 표선면 가시리한천 유허지를 돌아보고 「서재한공유허비문(恕齋韓公遺墟碑文)」을 지었는데 한천가시리 유허를 주나라 문왕 때의 소우(召苃)와 후한 때 정현(鄭玄)의 고사에 비유하여 매우 유서 깊은 곳으로 보았다.

즉 고려가 망하자 제주에 숨어서 관직에 나가지 않고 향약(鄕約)을 세우고 선비들을 가르쳐 학문이 일어나게 한 한천의 공덕(功德)이 매우 컸다고 평가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한천의 28대손인 한균도(韓均度)[1876~1927]는 1907년 『청주한씨파보(淸州韓氏派譜)』를 만들게 된다. 이때 한균도의 스승이던 안병택은 「서재한공유허비문」을 스승인 기우만(奇宇萬)에게 보냈는데 기우만은 이를 근거로 「제주한씨파보서문(淸州韓氏派譜序文)」을 써주었다.

[묘소]

한천의 묘소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마을 안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마을 안에 충의사라는 한천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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