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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1992
한자 丁蘭珠
이칭/별칭 마리아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신평리 10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웅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73년연표보기 - 정난주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01년연표보기 - 정난주 황사영백서 사건으로 제주도로 유배
몰년 시기/일시 1838년연표보기 - 정난주 사망
묘소 정난주 묘소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동일리 9번지 지도보기
성격 천주교도|유배인
성별

[정의]

조선 후기 황사영 백서 사건을 일으킨 황사영의 부인으로 제주 대정현에 온 유배인.

[개설]

황사영 백서사건은 1801년(순조 1) 신유박해로 청나라 신부 주문모 등 많은 천주교도가 처형되거나 귀양을 가자, 주문모에게 세례를 받은 황사영이 탄압의 실태와 그 대책을 적은 편지를 두 자[약 60cm] 가량 되는 명주천에 1만 3천 311자나 되는 한자로 적어 북경에 있던 프랑스 주교에게 보내려 하였다. 이 편지에서 황사영은 교회를 재건하고 포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프랑스 함대를 보내 조선 정부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을 적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탄로되어 연루자 16명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조선 정부는 천주교가 단순히 미풍양속과 인륜을 어기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라까지 팔아먹는다고 생각해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

[가계]

정난주(丁蘭珠)는 1773년(영조 49)에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아버지는 정약현(丁若鉉)이고,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정약종(丁若鍾)·정약전(丁若銓)·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그녀의 숙부이다. 남편은 황사영(黃嗣永)이고, 아들은 황경한(黃景漢)이 다.

[활동 사항]

정난주는 둘째작은아버지인 약전에게 서학(書學)을 배우고, 장성한 뒤에는 고모부인 이승훈(李承薰)으로부터 ‘마리아’라는 세례명을 받고 천주교도가 되었다. 남편 황사영(黃嗣永)은 17세에 장원급제한 인물로서 정약종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정난주와 결혼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정난주는 시어머니와 함께 그녀의 간난아들을 데리고 친정인 경기도 남양주의 마재로 피신하였다. 황사영은 충청북도 제천(提川)의 배론 골짜기로 피신하여 천주교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백서(帛書)를 써서 북경(北京)의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 이 일로 가산은 몰수되고 시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유배되고, 정난주는 제주도로 귀양가게 되었다. 귀향길 중 아들을 살리기 위해 하추자도 예초(禮草)리의 ‘황새바위’ 갈대밭에 아들을 내려두고 떠났다. 황경한은 마을에 살던 노인이 데려다 길렀으며, 현재 그 후손들이 남아 있다.

제주 대정현의 관비(官碑)가 된 정난주대정현 토호 김석구(金錫九)의 집에 위리안치되었는데, 김석구는 한때 별감으로 관속이었고, 현감과는 막역지우로 그의 자문역을 자임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여서 동헌 바로 뒤에 살았다. 이곳에서 정난주는 김석구의 아들 형제를 양자처럼 기르며 살면서, 또한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주민들을 교화시켰다. 1838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때 사람들이 ‘한양 할머니’가 죽었다며 슬퍼하였다고 전해진다.

[묘소]

정난주가 죽자 김석구의 아들 김상집(金尙集)이 그녀를 모슬봉 북녘, 속칭 한굴왓에 장사지냈다 하며, 현재 서귀포시 대정읍 동일리 9번지정난주 묘가 있다.

[상훈과 추모]

천주교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정난주 마리아의 묘지가 순교자묘역으로 성역화되어 많은 사람들이 참배하고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11.19 인명 오자 수정 황경헌(黃景憲) -> 황경한(黃景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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