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8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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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哲沖 |
영어음역 | Han Cheolchung |
이칭/별칭 | 홍도(弘道),몽계(夢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위은숙 |
[정의]
고려 후기 고령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홍도(弘道), 호는 몽계(夢溪). 할아버지는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낸 한련(韓璉)이고, 아버지는 전객령(典客令)을 지낸 한희적(韓希迪)이다. 부인은 이씨(李氏), 대언(代言) 권확(權確)의 딸 안동권씨(安東權氏), 위위(衛尉) 장지순(張之順)의 딸 영가장씨(永嘉張氏)가 있었다. 아들로는 군수(郡守) 한진(韓珍), 목사(牧使) 한렴(韓廉), 헌납(獻納) 한겸(韓兼), 교위(校尉) 한양(韓讓)을 두었다.
[활동사항]
한철충(韓哲沖)[1321~?]은 1353년(공민왕 2)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거처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역임한 뒤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올랐다. 고려 말 왕조 교체기에 고려 왕조에 대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節義)를 지켜 조선 왕조에 나아가지 않았다. 고려가 멸망한 후 경상북도 상주군의 백원산(白原山)으로 은신하였는데, 태조가 아들인 한렴에게 상주목사를 제수하고 조정에 나올 것을 권유하자 고령군 석절촌(石節村)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태종도 조정에 나올 것을 권유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경상남도 합천군 용주면 조동(釣洞)에서 일생을 마쳤다.
[저술 및 작품]
양광도안렴사를 역임할 때 지은 것으로 보이는 「교학석전영설조(磽确石田迎雪早)」라는 시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남아 있다. 시는 다음과 같다. “벼랑을 따라 보일 듯 말 듯 가느다란 길이 있구나, 옛 읍이 산을 의지하였는데, 산은 성(城)을 이루었네. 돌무더기 자갈밭에 눈은 일찍 내리고, 소나무 사이의 험악한 돌계단 길은 구름 속에 들어가 가로놓였네. 산중에 숨어 살고자 하나 참으로 방도가 없구나, 비록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나 진정이 아닌 것만 같다. 수일(數日) 사이 군재(郡齋)에 공사(公事)가 적어서, 발[簾]을 내리고 높이 누웠으니 맑은 기운 넉넉하다.”
[묘소]
묘소는 합천군 용주면 용지리 분토동(粉土洞)에 있다. 묘소는 1624년(인조 2) 개봉축(改封築)하고 비석을 세웠으나 자획(字劃)이 마멸(磨滅)되어 뒤에 생원 강세진(姜世晋)의 찬으로 다시 세웠다. 1724년(경종 4) 비석을 또 세웠으나 자획이 잘 보이지 않아 또다시 세웠다. 후손 한용헌(韓用憲)과 한용우(韓用禹) 등의 요청에 따라 1910년 봄 의금부도사를 역임한 은진(恩津) 송병순(宋秉珣) 찬으로 신도비를 세웠다.
묘 아래에 4칸의 재실 망송재(望松齋)와 부속 건물을 지었는데, 재호 망송재는 송도(松都)와 선산(先山)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충효를 다한다는 의미이다. 야성(冶城) 송준필(宋浚弼)의 망송재 중건기(重建記)가 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
[상훈과 추모]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를 기려 조선시대에 들어 두문동 72현으로 추모되었다. 합천군 사동(蓑洞)에 면암서원(冕巖書院)을 짓고 한철충과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 후계(后溪) 김준(金俊)의 삼현(三賢)을 향사(享祀)하였으며, 경현사(景賢祠)에도 배향(配享)되었다. 면암사(冕巖祠) 상량문(上樑文)은 대사간 이원조(李源祚)가 지었고 면암서원 몽계봉안문(夢溪奉安文)은 제학(提學) 이경재(李景在)가 지었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린 뒤, 서원의 빈터 앞에 몽계공원기신도비(夢溪公院基神道碑)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