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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609
한자 濟州大靜郡三義士碑
이칭/별칭 삼의사비,제주대정 삼의사비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백종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901년 10월 9일[음 8월 27일] - 강우백, 오대현, 이재수 사망
건립 시기/일시 1997년 4월 20일연표보기 - 제주 대정군 삼의사비 건립
현 소재지 추사기념관 앞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추사로 35-3 금산건강원 도로 맞은편 길가지도보기
성격 금석문|비
관련 인물 강우백|이재수|오대현
재질 오석, 화강암
크기(높이) 157㎝
너비 61㎝
두께 30㎝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 있는 강우백(姜遇伯)·이재수(李在秀)·오대현(吳大鉉) 등 세 의사(義士)를 기념하여 세운 비.

[개설]

제주대정 삼의사비(濟州大靜三義士碑)는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봉세관(捧稅官)의 부패와 일부 천주교도들의 행패에 맞서 1901년(신축년:광무 5) 5월 제주도민들이 봉기한 사건인 ‘이재수난’의 세 장두(狀頭)인 강우백·이재수·오대현을 기려 세운 비이다. 본 비 이전에 1961년 8월 대정 출신의 권순명(權純命)이 글을 짓고 대정마을 유지들과 이재수의 후손들이 세운 제주대정군삼의사비(濟州大靜郡三義士碑)가 홍살문거리에 세워졌었는데, 본 비가 건립되면서 없어졌다.

[건립 경위]

제주대정 삼의사비는 본래 ‘이재수난’의 세 의사(義士)를 기리기 위하여 60주기가 되는 해인 1961년에 대정읍 유지들과 이재수의 후손들이 안성리의 중심부인 ‘홍살문거리’에 세웠었다. 이후 1990년대 후반 비석의 초라함을 안타깝게 여기던 대정 지역 유지들이 남제주군에 건의하여 건립예산을 확보하고, 1997년 대정고을연합회의 주체로 현재의 자리인 대정읍 안성리 추사기념관 앞쪽 도로변에 세워지게 되었다.

[형태]

크기는 비신의 높이 157㎝, 너비 61㎝, 두께 30㎝이며 재질은 오석이다. 화강암 재질의 관석이 있으며, 기단은 3단으로 제주산 현무암으로 되어있다.

[금석문]

앞면에는 “제주대정삼의사비(濟州大靜三義士碑)”라고 썼고, 왼쪽면에는 “서기 1997년 4월 20일 대정고을 연합청년회 건립”이라고 썼다. 뒷면에는 “여기 세우는 이 비는 종교가 무릇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식이 될 것이다”라는 문구로 시작하여 이재수 난의 원인과 경과, 결과를 쓰고, 비석을 세우게 된 경위와 고쳐 세우게 된 경위를 서술하였다. 비문 전체는 다음과 같다.

“여기 세우는 이 비는 종교가 무릇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식이 될 것이다. 1899년 제주에 포교를 시작한 천주교는 당시 국제적 세력이 우세했던 프랑스 신부들에 의해 이루어지면서 그때까지 민간 신앙에 의지해 살아왔던 도민의 정서를 무시한데다 봉세관과 심지어 무뢰배들까지 합세하여 그 폐단이 심하였다. 신당의 신목을 베어내고 제사를 금했으며 심지어 사형(私刑)을 멋대로 하여 성소 경내에서 사람이 죽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이에 대정고을을 중심으로 일어난 도민 세력인 상무회(象武會)는 이 같은 상황을 진정하기 위하여 성내(城內)로 가던 중 지금의 한림읍(翰林邑)인 명월진(明月鎭)에서 주장인 오대현(吳大鉉)이 천주교 측에 체포됨으로써 그 뜻마저 좌절되고 만다. 이에 분기한 이재수(李在守)·강우백(姜遇伯) 등은 2진(二鎭)으로 나누어 성을 돌며 민병을 규합하고 교도들을 붙잡으니 민란으로 치닫게 된 경위가 이러했다. 규합한 민병 수천명이 제주시 외곽 황사평(黃蛇坪)에 집결하여 수차례 접전 끝에 제주성(濟州城)을 함락하니 1901년 5월 28일의 일이었다. 이미 입은 피해와 억울함으로 분노한 민병들은 관덕정(觀德亭) 마당에서 천주교도 수백 명을 살상하니 무리한 포교가 빚은 큰 비극이었다.

천주교측의 제보로 프랑스 함대가 출동하였으며 조선 조정에서도 찰리위사(察理衛使) 황노연(黃耆淵)이 이끄는 군대가 진입해와 난은 진압되고 세 장두는 붙잡혀 압송되어 재판과정을 거친 후에 처형되었다. 장두들은 끝까지 의연하게 제주 남아의 기개를 보였으며, 그들의 시신은 서울 청파동 만리재에 묻었다고 전해 오나 거두지 못하였다.

대정은 본시 의기 남아의 고장으로 조선 후기 이곳은 민중봉기의 진원지가 되어왔는데, 1801년 황사영(黃嗣永)의 백서사건으로 그의 아내 정난주(丁蘭珠)가 유배되어 온 후 딱 100년 만에 일어난 이재수 난은 후세에 암시하는 바가 자못 크다. 1961년 신축년에 향민들이 정성을 모아 제주 대정군 삼의사비(濟州大靜郡 三義士碑)대정고을 홍살문 거리에 세웠던 것이 도로 확장 등의 사정으로 옮겨 다니며 마모되고 초라하여 이제 여기 대정고을 청년들이 새 단장으로 비를 세워 후세에 기리고자 한다.“

[의의와 평가]

이재수 난은 천주교도들과 제주도 민중 사이의 충돌로 수백 명의 인명피해를 가져오고, 진압과정에서 프랑스 함대가 들어왔는가 하면 도민들은 프랑스에 배상금을 지급해야 하는 등 프랑스와의 국제적인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된 제주도 역사상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제주대정 삼의사비를 통해 구한말 제주도민의 생활상과 우리나라를 둘러싼 당시 국제정세 등을 가늠해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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