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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1996
한자 高炳五
이칭/별칭 유상(有常),정재(正齎)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웅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9년연표보기 - 고병오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8년 - 고병오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도에서 간재 전우의 문하로 수학
활동 시기/일시 1928년 - 고병오 순종 대상날에 망한단을 세우고 3년간 상복을 입고 제례를 드림
몰년 시기/일시 1972년연표보기 - 고병오 사망
출생지 고병오 출생지 -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3907번지 지도보기
추모비 고병오 학덕비 소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 1413 지도보기
성격 유학자|항일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원대정군지(元大靜郡誌) 저술

[정의]

일제 강점기 제주특별자치도 대정읍 상모리 출신의 유학자·항일운동가.

[가계]

자는 유상(有常), 호는 정재(正齎)이다. 1899년 대정읍 상모리 3907번지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고영학(高嬴鶴), 어머니는 강원부(姜元婦)이다.

[활동 사항]

고병오(高炳五)[1899~1972]는 어려서 가까운 친척이던 근재(眞齋) 고형박(高衡博)에게서 한문을 배웠다. 1918년에 전라북도 부안(扶安)군 계화도(界火島)까지 유학하여 간재(艮齎) 전우(田愚)의 문하생이 되었다. 3,000명이나 되는 간재의 문하 중에서 권순명·윤제술 등과 절친하여,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 우정을 돈독히 쌓았다.

일제 강점기 제주도에는 두개의 향교가 있었는데, 그중 대정향교는 1901년 신축민란 시 반외세·반서교(反西敎)·반봉건의 기치를 내걸던 상무사(商務社) 유림의 얼이 서려있었던 곳으로, 그 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고병오는 이러한 환경에 영향을 받아 전형적인 대정의 유림(儒林)으로 성장하였다.

고병오가 계화도에서 3년간 한문을 배우고 돌아온 이듬해인 1922년 스승 전우가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제문을 지어 명복을 빌기도 하였다. 순종이 붕어한지 2년 뒤인 대상날[1928년 음력 3월 14일]에는 권순명에게 비문을 짓게 하여 망한단을 세우고 3년간 상복을 입고, 삭망삭일 제례를 드리면서 망국의 한을 곡하며, 끝까지 유림의 전통을 지켰다. 일제의 창씨개명(創氏改名)도 거부하였다. 이 망한단이 있던 곳은 1932년에 일본군 군사기지로 편입되면서 파괴되었다.

고병오는 이후 향토사 분야에 매진하여, 동으로 홍로현의 끝인 법환-강정의 경계로부터 서로는 차귀현이던 현 제주시 한경면의 끝인 판포까지 이르는 대정현의 영역을 8년여에 걸쳐 탐방하며 경승(景勝)과 문헌·민속·생활상은 물론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까지 대정현의 다양한 유·무형 문화유산을 집대성한 『원대정군지(元大靜郡誌)』를 저술하였다. 1972년 겨울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고병오의 저술로는 『원대정군지(元大靜郡誌)』 외에도 『정재시집(正齋詩集)』·『정재잡록(正齋雜錄)』·『경하수필(耕霞隨筆)』·『정재사초(正齎私草)』 등 시선문집과 『대정현지(大靜縣誌)』와 같은 역사서 등이 다수 있다.

[상훈과 추모]

1936년에 그의 제자들이 요정선생문인권선회(要正先生門人勸善會)를 조직하여 그의 가르침을 따랐다. 1972년 고병오가 타계한 뒤에 문하생들에 의해 ‘정재고선생묘비(正齎高先生墓碑)’가 건립되었다. 또한 1998년 7월 정재의 후학 문하생들이 선생의 학덕을 기려 대정읍사무소 동편에 학덕비를 세워 공을 기리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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