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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700
한자 西歸浦金正喜流配址
이칭/별칭 추사 유배지,추사 적거지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166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임승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40년연표보기 - 김정희 제주도에 유배됨
문화재 지정 일시 2002년 4월 17일연표보기 -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 추사적거지라는 명칭으로 제주도 기념물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07년 10월 10일연표보기 -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 추사유배지라는 명칭으로 사적 제487호로 승격
2011년 7월 28일연표보기 -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 추사유배지에서 서귀포 김정희유배지로 명칭 변경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 사적으로 재지정
소재지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지도보기
성격 유배지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 있는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유배생활을 했던 곳.

[개설]

조선 시대 유배 중에 가장 가혹한 조치인 절도안치(絶島安置)는 중죄인을 원악(遠惡)의 도서에 유폐시키는 형벌이다. 조선 시대는 당쟁 때문에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유배가 활용되었고, 더욱이 원배(遠配)보다 도배(道配)로서 절도안치가 선호되었던 것이다. 원래 제주의 경우 ‘죄명이 특히 무거운 자가 아니면 정배되지 않는다’ 혹은 ‘제주목에는 특별한 교지가 없으면 정배되지 않는다’라고 『대전회통』에 규정하여 제주도로의 유배를 신중하게 다루었지만, 당쟁이 격화되던 조선 중기부터 남용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시대 5백 년 동안 제주도에 유배된 사람의 수는 대략 2백여 명으로 추정된다. 현재 파악된 조선 시대 정치 관료를 비롯한 유명 인물은 49명 정도이다. 그 가운데 대정현에 34명 정도가 유배되었는데, 제주 삼읍 가운데 대정현은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최악의 유배지였다.

헌종 때 유배된 김정희[1786~1856] 또한 대정현, 지금의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서 9년간 유배생활하였다. 김정희는 북학파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실학의 학문적 기초를 다지고, 중국연경을 직접 방문하여 청나라의 고증학을 받아들임으로써 약관의 나이에 실사구시학파의 거봉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김정희는 안동 김씨의 정치적 모략에 의해 자행된 1840년 윤상도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55세 때 대정현에 유배되어 9년을 지냈다.

김정희의 유배는 제주도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학문적 영향을 미쳤는데 그에게 사사한 김구오, 강도순, 박계첨 등은 제주필원으로 추앙받고 있다. 원악 유배지 대정에 머물러 있던 김정희는 제자인 역관 이상적을 통하여 많은 서적을 구할 수 있었고, 이 때문에 학문적 업적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이런 제자의 정성에 감동한 김정희는 송백 4그루가 서 있는 적거의 풍경을 그려 「세한도」[「완당세한도」국보 제180호]라고 칭하고 제자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이처럼 김정희는 유배지에서의 울분을 누르고 서도(書道)에 정진하였고, 그 결과 완성을 본 것이 추사체이다. 추사체는 결국 제주도 유배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변천]

김정희는 유배 초기에는 포도청의 부장인 송계순의 집에 머물다가 몇 년 뒤에는 현재의 유배지로 지정된, 그의 제자이기도 하였던 대정고을 유생 강도순의 집으로 이사했다.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는 1948년 제주 4․3사건 때 불타버리고 빈 터만 남았다가 1984년 강도순 증손의 고증을 받아 다시 복원한 것이다. 강도순의 증손자는 일제시대 사회주의 항일운동가이며, 해방 직후 남로당 조직부장을 지냈던 강문석이다. 또한 강문석의 사위는 4․3 당시 재산무장대 총사령관을 지냈던 이승진[일명 김달삼]이다. 현재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는 대정골에 유허비와 더불어 잘 보전되어 있다.

[위치]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1661-1번지 일대의 대정현성 동문자리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현황]

대정현성의 동문자리 앞에 위치한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는 제주 유배생활에서 완성된 김정희의 예술과 삶을 살펴 볼 수 있는 장소이다. 2010년 5월에 건립한 제주 추사관을 지나 돌담으로 둘러싸인 추사 유배지로 들어서면, 담장 안쪽에는 탱자나무가 늘어서 있고, 대문간에는 제주만의 독특한 대문인 정낭이 위치해 있다. 마당에는 초가집 3채가 ‘ㄷ’ 자형으로 자리 잡고 안거리 안채와 모커리 별채, 밖거리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정제[부엌]가 딸린 안거리는 주인 강도순의 집이고, 모커리는 김정희가 머물렀으며, 안거리와 마주한 밖거리는 김정희가 배움을 청해오는 청년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던 공간이었다.

제주도는 ‘추사 적거지’를 2002년 4월 17일 제주도 기념물로 지정하였고, 문화재청은 2007년 10월 10일에 ‘추사 유배지’로 이름을 고쳐 사적 제487호로 승격시켰으며, 2011년 7월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최근 2011년에는 김정희의 제주 유배생활을 체험하는 길 즉, 추사 유배길 3개 코스가 개장되었다. 이는 ‘귀양다리[유배인을 뜻하는 제주어]’라 하여 김정희의 흔적과 자취가 남아있는 서귀포시 대정읍과 안덕면을 중심으로 유배 노정을 따라가는 길인데, 김정희 제주 유배 생활의 자취를 체험할 수 있도록 개발되어 많은 관광객과 도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의의와 평가]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일대는 추사 김정희에게 있어, 추사체를 완성하게 한 역사 공간이자, 추사 예술이 완성되는 기간에 살았던 곳으로서 그 학술적·문화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3.01.22 내용 수정 수정원고로 내용 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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