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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허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798
한자 陽川許氏
이칭/별칭 공암 허씨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강만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 시기/일시 1392년 - 양천허씨 입향
본관 양천 - 경기도 양천군
입향지 양천허씨 입향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구좌읍 종달리
세거|집성지 양천허씨 집성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호근동·하효동
성씨 시조 허선문(許宣文)
입향 시조 허손(許孫)

[정의]

허선문(許宣文)을 시조로 하고 허손(許愻)을 입도조(入島祖)로 하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에 세거하는 성씨.

[연원]

양천허씨의 연원은 가락국 김수로왕의 비 허황옥(許黃玉)에 두고 있다. 허황옥은 아들 10형제[일설에는 9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거등은 김씨로 왕통을 잇게 하고 두 아들은 허왕후의 뜻에 따라 허씨로 사성했다. 김해 김씨는 부성, 허씨는 모성을 각각 계승했기에 오늘날에도 두 성씨는 서로 혼인을 피하고 있다.

양천허씨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은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정벌할 때 군량을 조달해 준 공으로 세거해 온 공암의 공암촌주(孔巖村主)로 봉해져 그곳을 식읍으로 받았다고 한다. 양천허씨를 일명 공암 허씨(孔巖許氏)라 함은 여기에서 연유된 것이다.

[입향 경위]

제주 입도조 허손(許愻)은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냈으며 시조 허선문(許宣文)의 15세손이다. 고려가 망하자 자진하여 순국한 대제학 허흠(許欽)의 아들이며, 허손(許愻)의 형 허징(許徵)은 두문동 고려 절신 72인의 한 사람이었다. 1392년(태조 1) 8월 천군천호였던 아들 허우와 함께 조선에 불복한 죄로 제주도에 유배되어 입도하여 구좌읍 종달리에서 은거하다 일생을 마쳤다.

제주의 양천허씨 가문은 입도 5세에 이르러 발흥하기 시작했다. 동악(東岳) 허영필(許榮弼), 운악(雲岳) 허영림(許榮林), 남악(南岳) 허영집(許榮輯), 서악(西岳) 허영보(許榮寶), 한악(漢岳) 허영종(許榮宗) 등 5형제는 무과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가 연산군의 폭정이 심해지자 귀향하여 정의(旌義) 돈원(敦原)[서귀포시 표선면 세화리]으로 옮겨 살았다. 허영필의 아들 허선손(許先孫)은 어모장군 부사직 가선대부가 되었으며 왜구 격퇴에 공이 많아 선조로부터 숭정대부를 추증받았다. 남악 허영집의 6세손 허준(許濬)은 유향 좌수와 향공진사(鄕貢進士)로 훈장 생활을 했다.

[현황]

오늘날 제주의 양천허씨는 입도 5세손 동악(東岳) 허영필(許榮弼) 형제들을 파조로 형성하여 전도에 퍼져 살고 있는데, 서귀포시 호근동하효동 등을 중심으로 한 지역 내에 있는 양천허씨 종친회를 응악파라 부르고 있다.

2000년 11월 현재 제주도에는 1,348가구에 4,533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서귀포시 지역에는 699가구에 2,253명이 살고 있다.

[관련 유적]

제주 입도조 허손(許愻)의 묘는 제주특별자치도 구좌읍 종달리[속칭 매망마르]에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7.10.26 한자 오타 수정 허징(許懲)->허징(許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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