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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822
한자 任觀周
이칭/별칭 숙빈(叔賓)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재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32년연표보기 - 임관주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56년 - 임관주 정신문과 병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62년 - 임관주 지평, 정언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67년연표보기 - 임관주 대정현으로 유배됨
활동 시기/일시 1775년 - 임관주 사간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82년연표보기 - 임관주 흑산도로 유배됨
활동 시기/일시 1784년 - 임관주 남해로 이배됨
추모 시기/일시 1801년 - 임관주 복관됨
유배|이배지 임관주 유배지 - 지금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지도보기
유배|이배지 임관주 이배지 -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성격 문신|유배인
성별
본관 풍천
대표 관직 지평|정언

[정의]

조선 후기 제주도 대정현 창천리에 유배된 문신.

[가계]

본관은 풍천, 자는 숙빈(叔賓). 아버지는 임섬(任暹)이며, 어머니는 송필훈(宋必勳)의 딸이다.

[활동 사항]

임관주(任觀周)는 1756년(영조 32) 정시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767년(영조 43) 정언으로 재임 중 언론의 중요성, 『어제유곤록(御製裕昆錄)』의 불합리한 서술, 재상의 잦은 교체, 제술(製述) 시험 때 성균관 유생을 모독한 도승지 송영중(宋瑩中)의 파직, 서울과 지방 관원들의 비리 적발, 무장들의 권위 존중 등 10여 가지에 달하는 조목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특히 이 상소문 가운데 “이명운(李明運)은 제주목사로 있을 때에 수탈만 일삼고 7천명의 기민을 돌보지 않았다. 신은 이명운을 영원히 금고시키고 그 전형의 관원에게 빨리 파직의 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본다.”는 내용이 있었다.

임관주는 이 상소로 인하여 대정현 창천리로 유배되었으며 3개월 정도 유배 생활을 하다 70세의 노부가 있다는 이유로 특별히 방면되었다. 현재 임관주가 시각(時刻)한 마애명이 창천과 산망산·용연·백록담 등에 남아 있다.

복관 후 1775년(영조 51) 사간으로 재임 중에는 무과 응시생 중에서 시험관을 모욕한 자에 대해 엄한 형벌을 주고 유배를 보낼 것을 주청하였고 1777년(정조 1) 집의 재임 중에는 토역(討逆), 성균관의 개방, 과장(科場)에서의 부정행위 방지, 궁방(宮房) 시장(柴場)의 혁파, 북도(北道) 흉황과 관련한 함경도 관찰사 조중회(趙重晦)의 파직 등을 주청하였다. 1782년(정조 6) 시폐(時弊)를 상소하자 대사헌 김이소(金履素)의 탄핵을 받아 흑산도로 유배되었다가 1784년(정조 8)에 남해현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1801년(순조 1) 복관(復官)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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